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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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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열린 가톨릭교회의 공의회로,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종교적 사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교회의 현대화를 목표로, 전례 개혁, 교회론 재정립, 에큐메니즘, 비그리스도교와의 관계 개선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으며, 4개의 헌장, 9개의 교령, 3개의 선언 등 16개의 문서를 발표했다. 이 공의회는 가톨릭교회의 미사 변화, 개신교 및 동방 정교회와의 관계 개선, 사회적 책임 강조 등 다양한 영향을 미쳤으며, 공의회 문헌 해석에 대한 논쟁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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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요
명칭제2차 바티칸 공의회
로마자 표기Je 2-cha Batikan Gong'uihoe
다른 이름바티칸 II
라틴어 명칭Concilium Oecumenicum Vaticanum Secundum
연혁
시기1962년 10월 11일 – 1965년 12월 8일
장소성 베드로 대성당
소집교황 요한 23세
주재교황 요한 23세, 교황 바오로 6세
참석자최대 2,625명
이전 공의회제1차 바티칸 공의회 (1869–1870)
주제
주요 논의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미완료 과제 완수 및 현대 세계의 요구에 대한 교회 쇄신과 일치 운동
중요 문헌
4대 기본 헌장Sacrosanctum Concilium (전례 헌장)
Lumen gentium (교회 헌장)
Dei verbum (계시 헌장)
Gaudium et spes (사목 헌장)
9개의 교령Inter mirifica (매스 미디어에 관한 교령)
Orientalium Ecclesiarum (동방 교회에 관한 교령)
Unitatis redintegratio (교회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Christus Dominus (주교에 관한 교령)
Perfectae caritatis (수도 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령)
Optatam totius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
Apostolicam actuositatem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Ad gentes (선교에 관한 교령)
Presbyterorum ordinis (사제 직무에 관한 교령)
3개의 선언Gravissimum educationis (그리스도교 교육에 관한 선언)
Nostra aetate (비그리스도교에 관한 선언)
Dignitatis humanae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2. 공의회의 배경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열리기까지 가톨릭교회 안팎에서는 여러 변화와 논의가 있었다. 우선 1869년부터 1870년까지 열렸던 제1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탈리아 통일 과정에서 이탈리아군이 로마를 점령하면서 중단되었다. 이 때문에 교황 수위권과 신앙-이성 관계 등 일부 주제만 다루어졌고, 주교단이나 평신도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마무리되지 못한 채 과제로 남게 되었다.[7]

20세기 들어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을 거치면서 세계는 정치, 사회, 경제, 기술 등 모든 면에서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이러한 시대적 변화 속에서 일부 주교들은 교회가 세상의 문제에 더 적극적으로 응답하고 새로운 방식으로 소통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다.

신학 분야에서도 변화의 움직임이 있었다. 교황 비오 12세1943년 발표한 회칙 Divino afflante Spiritula[3]는 가톨릭 성경 연구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했고, 원어 성경 번역을 장려했다.[4][5] 또한 1930년대부터 일부 신학자들은 기존의 신 스콜라 철학을 넘어 성경교부 연구에 기반한 신학을 추구하는 누벨 신학(Nouvelle Théologie, 새로운 신학) 운동을 전개하며 에큐메니즘, 평신도 신학 등 새로운 주제를 다루었다.[6] 하지만 이러한 신학적 시도들은 1950년 교황 비오 12세의 회칙 Humani generisla 등을 통해 일부 비판과 제약을 받기도 했는데, 이는 교회 내 보수적 입장과 쇄신을 추구하는 흐름 사이의 긴장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제1차 바티칸 공의회의 미완의 과제, 급변하는 현대 사회에 대한 적응 필요성, 그리고 교회 내부의 신학적 쇄신 요구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새로운 공의회 개최의 분위기가 무르익고 있었다.

2. 1. 비오 11세의 공의회 소집 시도 (1923년)

1923년 5월 23일, 비오 11세는 추기경 회의에서 1870년 중단되었던 제1차 바티칸 공의회를 이어가기 위해 공의회를 다시 여는 것이 적절한지 물었다. 그러나 이 제안에 대해 추기경들은 거의 만장일치로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특히 비요 추기경은 공의회 개최 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주교들 사이에 깊은 의견 차이가 존재하며, 이로 인해 합의에 이르지 못할 위험이 크다고 보았다. 또한, 당시 대두되던 근대주의자들이 공의회를 자신들의 의도대로 조작하여 교회 내에 혁명적인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을 우려했다. 더불어 전통적인 교회 운영 방식 대신, 세속적인 민주주의 방식의 토론이나 선전 활동이 교회 내에 도입될 위험성도 제기했다.

2. 2. 비오 12세의 공의회 소집 검토 (1948년)

1948년, 교황 비오 12세는 비오 11세가 품고 있던 공의회 구상을 검토했다. 에르네스토 루피니 추기경과 오타비아니 추기경은 공의회가 새로운 근대주의에 물든 이단 신학을 배척할 적절한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에 비오 12세는 65명의 주교들에게 의견을 물었지만, 공의회가 오히려 위험하며 교회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공의회 개최 구상을 포기했다.

2. 3. 요한 23세의 공의회 소집 발표 (1959년)

요한 23세는 1958년 10월 선출된 지 3개월도 채 안 된 1959년 1월 25일에 공의회 소집 의사를 발표했다.[9] 이 발표는 로마의 성 바오로 대성전에 딸린 베네딕토회 수도원 강당에서 이루어졌으며, 당시 참석했던 17명의 추기경들에게는 매우 놀라운 소식이었다.[10][11] 교황 자신은 이 결정을 오랜 숙고 끝에 내린 것이 아니라 "예상치 못한 곳에서 문득 찾아온 봄날 나무의 싹과 같이 태어난" 결정이라고 표현했다.

발표 열흘 전, 요한 23세는 국무원장인 도메니코 타르디니 추기경에게 공의회 개최 구상을 밝혔고, 타르디니 추기경은 이를 열렬히 지지했다. 요한 23세는 타르디니와의 대화 중에 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고 말했지만, 사실 보수적인 성향의 에르네스토 루피니 추기경과 알프레도 오타비아니 추기경이 이미 1948년에 비오 12세에게, 그리고 1958년 10월 27일에는 요한 23세에게 공의회 개최를 제안한 바 있었다.[12] 당시 루피니와 오타비아니 추기경은 공의회를 통해 근대주의로 여겨지는 새로운 신학 조류를 비판하고 배척할 기회로 보았다. 그러나 비오 12세는 공의회가 오히려 교회에 위험을 초래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1948년의 공의회 개최 구상을 포기했었다.

요한 23세의 갑작스러운 공의회 소집 발표는 교황청 내부에 큰 혼란을 일으켰다. 많은 추기경들은 공의회가 진행되는 동안 주교들이 언론 매체의 압력에 시달릴 것을 우려하며 공의회 소집을 반대하기도 했다. 이러한 우려의 배경에는 요한 23세가 과거 불가리아 교황 대사(1925년-1934년) 시절부터 동방 가톨릭 교회가 동방 정교회 신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귀일(歸一, 가톨릭으로 돌아오게 함) 선교 활동에 비판적인 입장을 보여왔고,[117] 교회 일치 운동, 즉 새로운 에큐메니즘을 구상하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도 작용했다.

2. 4. 신학자들의 입장

1930년대에 이르러 신 스콜라 철학과 교황 회칙에 기반한 기존 신학에 대해 일부 신학자들은 건조하고 영감을 주지 못한다고 느끼며 거부감을 나타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ressourcement|르수르스망프랑스어, 즉 '근원으로의 회귀'를 주장하는 신학 운동이 일어났다. 이들은 성경교부 연구에 직접 신학의 기초를 두려 했으며, 신학의 역사, 노동의 신학, 에큐메니즘, 평신도의 신학, 그리고 "세상의 현실"에 대한 신학 등 새로운 주제들을 논의하기 시작했다.[6]

이러한 새로운 신학적 흐름은 la nouvelle théologie|라 누벨 테올로지la('새로운 신학')라고 불렸고, 로마 교황청의 주목을 받게 되었다. 결국 1950년 교황 비오 12세는 회칙 Humani generis|후마니 게네리스la("가톨릭 교리의 기초를 훼손하려는 몇몇 그릇된 의견에 관하여")를 발표하여, 특정 인물을 지목하지는 않았지만 '새로운 신학'을 추구하는 이들을 비판했다. 이 회칙은 누벨 신학뿐만 아니라 에큐메니즘 및 성경 연구의 발전에도 제동을 거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이로 인해 일부 저작물은 금서 목록에 오르고, 앙리 드 뤼박과 이브 콩가르와 같은 신학자들은 1958년 비오 12세가 선종할 때까지 가르치거나 출판하는 것이 금지되는 등 어려움을 겪었다. 1960년대 초에는 칼 라너와 젊은 한스 큉 등도 교황청의 의심을 받는 신학자들로 거론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소집되자, 신학자들 사이에서는 크게 두 가지 입장이 나타났다.

  • 카를 라너나 이브 콩가르 등은 현대 사회에서 인류가 축적한 경험과 지식을 전통적인 가톨릭 신앙과 조화시키려는 입장을 보였다. 이는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교회의 가르침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시도로 이해될 수 있다.
  • 반면, 요제프 라칭거(훗날 교황 베네딕토 16세)나 앙리 드 뤼박 등은 고대 교회의 신앙과 전통에서 현대 교회가 나아갈 방향과 활력의 원천을 찾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교회의 근본으로 돌아가 정체성을 재확인하려는 입장으로 볼 수 있다.

3. 공의회 준비 과정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준비에는 약 2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이 기간 동안 전 세계 가톨릭교회 관계자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교황이 임명한 준비 위원회들이 공의회 의제 초안을 마련하는 과정을 거쳤다.[118][119][120][121][122][123]

3. 1. 준비 위원회 구성 (1959년)

공의회 준비에는 2년이 소요되었다. 이 기간 동안 먼저 전 세계 가톨릭교회 관계자들로부터 공의회 의제에 관한 의견서를 수집했고, 이후 교황이 임명한 10개의 준비 위원회가 이를 검토하여 공의회 의제 초안을 작성했다.

1959년 5월 17일, 교황 요한 23세는 당시 국무장관이었던 도메니코 타르디니 추기경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전 준비 위원회(commissio antepraeparatorialat)를 임명했다.[118]

1960년 6월 5일, 요한 23세는 자발 교서 《수페르노 데이 누투》(Superno Dei Nutulat, 하느님의 높은 뜻에 따라)를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10개 준비 위원회(commissiones praeconciliareslat)와 3개의 사무국을 설립했다. 이와 함께, 이 위원회들을 총괄하는 120명 규모의 "공의회 중앙 준비 위원회(Central Preparatory Commission for the Councillat)"를 설치하고, 다음 날 일본의 도이 다쓰오 추기경을 포함한 36명의 중앙 준비 위원을 임명했다. 중앙 준비 위원회는 전 세계 주교들의 제안을 바탕으로 10개 준비 위원회가 작성한 초안을 심사하는 책임을 맡았다. 중앙 준비 위원회와 각 위원회, 고문(consultorlat)의 인원은 이후 계속 확대되어, 1961년 2월에는 710명(위원 393명, 고문 317명), 같은 해 12월에는 827명으로 늘어났다. 중앙 위원회는 1962년 6월까지 여러 차례 회의를 열어 공의회 준비를 진행했다.

이미 중앙 준비 위원회 내부에서는 대립하는 추기경들 사이의 갈등이 나타나고 있었다. 신앙교리성 (현 신앙교리부) 장관 대리였던 알프레도 오타비아니 추기경이 이끄는 신학 위원회와 이에 협조하는 보수적인 "로마파" 그룹, 그리고 그리스도교 일치 촉진 사무국 사무총장 아우구스틴 베아 추기경과 그의 협력자들이 중심이 된 개혁 성향의 그룹 간의 긴장감이 존재했다.

3. 2. 10개 준비 위원회와 3개 사무국 설치 (1960년)

공의회 준비에는 2년이 소요되었다. 이 기간 동안 전 세계 가톨릭교회 관계자들로부터 공의회 의제에 관한 의견을 수집하였고, 이후 교황이 임명한 10개의 준비위원회가 이를 검토하여 공의회 의제 초안을 작성했다.

1960년 6월 5일, 요한 23세는 자발 교서 《수페르노 데이 누투》(Superno Dei Nutula)를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위한 10개의 준비 위원회(commissiones praeconciliaresla)와 3개의 사무국을 설치했다. 각 위원회 및 사무국의 구성과 책임자는 다음과 같다.[119][120][121][122][123]

위원회/사무국 명칭 (라틴어)위원회/사무국 명칭 (한국어)위원장 / 사무국장
De doctrina fidei et morum신앙과 윤리 교리 위원회알프레도 오타비아니
De episcopis et dioecesium regimine주교 및 교구 통치 위원회파올로 마렐라
De ecclesiis orientalibus동방 교회 위원회암레토 조반니 치코냐니
De sacramentorum disciplina성사 규율 위원회베네데토 알로이지 마셀라
De disciplina cleri et populi christiani성직자와 그리스도인 백성을 위한 규율 위원회피에트로 치리아치
De religiosis수도자 위원회일데브란도 안토니우티
De sacra liturgia전례 위원회아르카디오 라라오나 사랄레기
De missionibus선교 위원회그레고리오 피에트로 15세 아가자니안
De seminariis, de studiis, et de educatione catholica신학교, 연구, 가톨릭 교육 위원회주세페 피차르도
De fidelium apostolatu and De scriptis prelo edendis et de spectaculis moderandis평신도 사도직, 언론 및 공연 규제 위원회페르난도 센토
기술 및 조직 위원회기술 및 조직 위원회구스타보 테스타
Ad christianorum unitatem fovendam 사무국그리스도교 일치 촉진 평의회아우구스틴 베아
행정 사무국행정 사무국알베르토 디 조리오



동시에 교황은 이 위원회들을 총괄하는 120명 규모의 "공의회 중앙 준비 위원회"(Central Preparatory Commission for the Council영어)를 설치하였고, 다음 날 일본의 도이 다쓰오 추기경을 포함한 36명의 중앙 준비 위원을 임명했다. 중앙 준비 위원회는 전 세계 주교들의 제안을 바탕으로 10개 준비 위원회가 작성한 초안을 심사하는 역할을 맡았다.

중앙 준비 위원회와 각 위원회, 그리고 고문(consultorla)의 인원은 이후 계속 확대되었다. 1961년 2월까지 총 710명(위원 393명, 고문 317명)에 달했으며, 같은 해 12월에는 827명으로 증가했다. 중앙 위원회는 1962년 6월까지 여러 차례 회의를 개최하며 공의회 준비 작업을 진행했다.

이 중앙 준비 위원회 내부에서는 이미 신앙교리성 장관 대리인 알프레도 오타비아니 추기경이 이끄는 신학 위원회와 그를 지지하는 소위 "로마파"와, 그리스도교 일치 촉진 평의회 사무총장인 아우구스틴 베아 추기경과 그를 지지하는 자유주의적 성향의 그룹 간에 대립 구도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3. 3. 중앙 준비 위원회 내 갈등

1960년 6월 5일, 요한 23세 교황은 공의회 준비를 위해 10개의 준비 위원회와 3개의 사무국을 설치하고, 그 위에 120명으로 구성된 "공의회 중앙 준비 위원회"를 두었다. 이 중앙 준비 위원회는 전 세계 주교들의 제안을 바탕으로 10개 준비 위원회에서 작성한 초안을 심사하는 역할을 맡았다.

그러나 이 중앙 준비 위원회 단계에서부터 이미 보수파와 진보파 사이의 갈등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한 축은 신앙교리성 장관 대리였던 알프레도 오타비아니 추기경이 이끄는 신학 위원회와 그에 동조하는 이른바 '로마파'였다. 다른 한 축은 그리스도교 일치 촉진 사무국 사무총장 아우구스틴 베아 추기경과 그의 보좌관 얀 빌레브란, 그리고 이들과 뜻을 같이하는 자유주의적 성향의 인물들이었다.

이러한 대립은 특히 전례 개혁 논의 과정에서 두드러졌다. 중앙 준비 위원회 총회에서 아르카디오 라라오나 추기경은 안니발레 부그니니 신부가 작성한 미사 통상문 개혁 초안을 설명했다. 이 초안은 전례 전체를 혁신적인 원칙에 따라 체계적으로 개혁하려는 계획을 담고 있었다. 데프너 추기경과 레르카노 추기경 등 진보적인 교부들은 이 초안을 높이 평가하며 지지했다.

가톨릭 사제가 공의회 이후에 만연한 미사 형태인 트리덴틴 미사를 거행하며, 축성 후 성작을 보여줍니다.


반면, 오타비아니 추기경을 비롯한 '로마파'는 강하게 반발했다. 오타비아니는 이 초안이 "과도한 혁신에 너무나 큰 문을 열어젖힌다"고 비판했으며, 고드프레 추기경은 이 개혁이 "기독교인들에게 경악을 일으키는 혁명적인 개혁"이며 "예배를 버리고 성전을 멸시한다는 의미에서 반전례적"이라고 주장하며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또한, 아가자니안 추기경이 선교 지역을 위해 자국어 미사를 허용하자고 제안하자,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각 지역 주교회의가 전례 규정을 정하게 되면 민족별, 국가별 전례가 난립하여 라틴어를 중심으로 한 전례의 통일성을 해치고, 그레고리오 성가와 같은 교회 음악 및 예술의 쇠퇴를 가져올 위험이 있다고 지적하며 반대했다.

3. 4. 중앙 준비 위원회 총회

1960년 6월 5일, 요한 23세는 자의 교서 Superno Dei Nutu|수페르노 데이 누투la를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위한 10개의 준비 위원회와 3개의 사무국을 설립했다. 이와 동시에 이 위원회들을 감독하는 120명으로 구성된 "공의회 중앙 준비 위원회"를 설치하고, 다음 날 일본의 도이 다쓰오 추기경을 포함한 36명의 위원을 임명했다. 중앙 준비 위원회는 전 세계 주교들의 제안을 바탕으로 각 준비 위원회에서 작성한 초안을 심사할 책임이 있었다. 위원회와 고문의 수는 계속 늘어나 1962년 6월까지 활동하며 공의회 준비를 진행했다.

그러나 중앙 준비 위원회 내부에서는 이미 대립 구도가 형성되고 있었다. 신앙교리성 장관 서리 알프레도 오타비아니 추기경의 신학 위원회와 그와 협력하는 보수적인 "로마파"가 있었고, 다른 한편에는 그리스도교 일치 촉진 사무국 사무총장 아우구스틴 베아 추기경과 그의 보좌관인 얀 빌레브란트, 그리고 그들에게 협조하는 자유주의자들이 있었다.

중앙 준비 위원회 총회에서는 1962년 3월부터 4월에 걸쳐 전례에 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3월 27일, 아르카디오 라라오나 사랄레기 추기경은 안니발레 부니니 신부의 입회하에, 부니니 초안의 미사 통상문 개혁 계획을 참석한 교부들에게 설명했다. 라라오나 추기경 자신은 이 개혁에 저항했지만, 자신의 전임자였던 가에타노 치코냐니 추기경이 서명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설명을 맡았다. 이 초안은 혁신적인 원칙에 따라 전례 전체를 체계적으로 개혁하는 계획이었다.

이 초안에 대한 반응은 나뉘었다. 진보적인 교부들은 칭찬했다. 데프너 추기경은 "중앙 위원회에 제출된 모든 초안 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 중 하나"라고 찬사를 보냈고, 레르카노 추기경도 이 초안에 찬성했다. 반면, '로마파' 추기경들은 반대했다. 오타비아니 추기경은 "과도한 혁신에 너무나 큰 문을 열어젖힌다"고 비판했고, 고드프레 추기경은 이 개혁이 "기독교인들에게 경악을 일으키는 혁명적인 개혁"이며, "예배를 버리고 성전을 멸시한다는 의미에서 반전례적이다"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3월 30일, 그레고리오 피에트로 아가자니안 추기경은 선교국을 위해 자국어 미사를 제안했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전례와 전례 양식에 관해 주교 평의회가 법규를 제정할 수 있다는 원칙이 받아들여지면, 그것이 비록 교황의 승인을 거쳐서야 허가될지라도, 민족 전례와 국민 전례 양식으로 회귀하게 되어, 전례의 일치를 위한 과거 2세기의 모든 노력이 헛되게 되고, 예술과 그레고리오 성가는 몰락하여 무질서 상태가 될 위험이 있다”고 지적했다.

한편, 요한 23세는 73개에 달하는 초안이 준비 작업에 전혀 지침을 제시하지 못해 너무 많다고 여겼기 때문에, 비밀리에 레오 요제프 수엔스 추기경에게 그 축소를 맡겼다. 수엔스 추기경은 예비 초안을 모두 '교회 내부를 향한 발언'과 '교회 외부를 향한 발언'이라는 두 개의 틀로 재구성하려 시도했다. 이 수엔스 계획은 1962년 4월 말에 준비가 완료되었고, 5월 중순에는 교황의 명령으로 이 계획을 소수의 유력한 추기경들, 즉 데프너, 몬티니, 시리, 리에나르, 렐카노 등에게 전달했다. 이는 예비 초안을 폐기하는 것을 의미하며, 한편으로는 준비 위원회에 계속 일을 시키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다른 위원회에 그 폐기를 맡겼다.[118][119][120][121][122][123]

3. 5. 최종 총회 (1962년 6월 18일)

요한 23세 교황은 공의회 준비 과정에서 마련된 73개의 방대한 초안이 지나치게 많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중앙 준비 위원으로 임명했던 수엔스 추기경에게 비밀리에 초안 축소 및 재구성 작업을 지시했다. 수엔스는 이 초안들을 교회 내부 문제와 외부 세계를 향한 문제라는 두 가지 큰 틀로 재구성하는 계획을 세웠다. 이 계획은 1962년 4월 말에 완료되었고, 5월 중순 교황의 명령으로 데프너, 몬티니, 시리, 리에나르, 렐카노 등 소수의 핵심 추기경들에게 전달되었다. 이는 기존 초안들에 대한 전면적인 재검토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한편, 공의회 준비의 최종 단계인 중앙 준비 위원회 내부에서는 이미 보수파와 개혁파 간의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특히 신앙 교리성 장관 대리 알프레도 오타비아니 추기경이 이끄는 신학 위원회와 '로마파'로 불리는 그룹은 전통적인 입장을 고수하려 했다. 반면, 그리스도교 일치 촉진 사무국 사무총장 아우구스틴 베아 추기경과 그를 지지하는 그룹은 교회 쇄신과 에큐메니즘적 대화를 강조했다.

그리스도교 일치 촉진 사무국은 에큐메니즘, 종교의 자유, 유대인 문제 등에 관한 자체 초안을 준비했으나, 이 초안들은 오타비아니의 신학 위원회에서 수용되지 않았다. 이러한 대립과 교착 상태를 해결하기 위해, 1962년 2월 1일 요한 23세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논쟁적인 초안들, 특히 종교의 자유에 관한 베아 추기경 측의 초안이 오타비아니 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직접 중앙 준비 위원회에서 논의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는 공의회에서 보다 개방적이고 폭넓은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한 조치로 평가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중앙 준비 위원회는 1962년 6월까지 활동하며 공의회 개막을 위한 최종 준비 작업을 마무리했다.

4. 공의회 진행 과정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2년 10월 11일부터 1965년 12월 8일까지 총 네 번의 회기에 걸쳐 진행되었다. 교황 요한 23세에 의해 소집되어 시작되었으나, 제1회기 이후 교황이 선종하면서 1963년 교황 바오로 6세가 공의회를 이어받아 마무리했다.

공의회 초기에는 교황청이 준비한 초안을 중심으로 논의가 진행될 것으로 예상되었으나, 제1회기 위원회 구성 과정에서부터 공의회 교부들의 주체적인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다. 특히 중부 유럽 주교들을 중심으로 한 진보파(소위 '라인 동맹')가 위원회 구성에서 다수를 차지하면서 공의회는 점차 개혁적인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단순히 교황청의 안을 통과시키는 것이 아니라, 교부들이 직접 토론하고 수정하며 공의회의 방향을 설정해 나가는 중요한 변화였다.

각 회기 동안 공의회는 전례, 계시, 교회, 주교의 역할, 종교의 자유, 일치 운동(에큐메니즘), 현대 세계와의 대화 등 광범위한 주제를 다루었다. 이 과정에서 보수파와 진보파 간의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때로는 교황의 중재가 이루어지기도 했다. 이러한 논의를 거쳐 전례 헌장, 교회 헌장, 계시 헌장, 현대 세계 헌장 등 가톨릭 교회의 중요한 가르침을 담은 16개의 문헌이 최종적으로 승인되고 반포되었다.

공의회는 교회의 내적 쇄신과 현대 사회와의 적극적인 대화를 추구하며 1965년 12월 8일 막을 내렸다. 특히 마지막 날에는 1054년 교회 대분열 이후 천 년 가까이 이어져 온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 간의 상호 파문을 철회하는 공동 선언이 발표되어 교회 일치 운동에 중요한 진전을 이루었다.

4. 1. 제1회기 (1962년 10월 11일 ~ 12월 8일)

1962년 10월 11일, 교황 요한 23세를 중심으로 2,500여 명의 공의회 교부들이[126][127] 성 베드로 대성당에 모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시작되었다. 개회식에는 세계 86개국 정부 사절단도 참석했다.

장엄한 개회 연설에서 요한 23세는 공의회의 목표가 교회의 신앙 유산을 현대 상황에 맞게 표현하고, 신자, 그리스도인, 나아가 세계와 교회의 일치를 도모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세계의 오류를 규탄하기보다는 자비심으로 세계의 문제에 대처하는 태도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과거의 비관적인 전망("불운한 예언자")을 거부하고 긍정적인 자세를 촉구했다. 또한, 교회의 가르침 자체("신앙의 유산")와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은 구분되어야 하며, 현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사목적 표현법을 찾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위원회 구성과 진보파의 부상제1회기의 첫 번째 총회는 10월 13일에 열려 10개 분과 위원회의 위원 선거를 진행할 예정이었다. 교황청은 공의회 준비에 참여했던 위원들의 명단을 배포하며 이들을 선출할 것을 사실상 권고했다. 그러나 프랑스 의 리에나르 대주교가 마이크를 잡고 "교황청 명단은 주교들의 자유로운 선택을 제약하는 압력"이라고 비판하며 이의를 제기했고, 큰 박수를 받았다[128]. 이어 독일 쾰른의 프링스 대주교가 리에나르를 지지하자 더 큰 환호가 터져 나왔다. 결국 의장 티스랑 추기경은 선거를 10월 16일로 연기했고, 첫 총회는 매우 짧은 시간 안에 끝났다. 이는 교황청의 의도와 달리 공의회 교부들이 주체적으로 의사를 결정하려는 움직임의 시작이었으며, 한 네덜란드 주교는 이를 "우리의 첫 번째 승리"라고 평가했다.

10월 16일 제2차 총회에서 실시된 투표 결과, '라인 동맹' 또는 '유럽 동맹'이라 불린 중부 유럽 주교 중심의 진보파 명단이 과반수를 얻었으나, 공의회 규정인 3분의 2에는 미치지 못했다. 진보 성향 추기경들은 과반수 득표가 공의회의 명백한 의지라며 교황에게 규칙의 예외 적용을 요청했고, 요한 23세는 이를 받아들였다. 그 결과, 진보파는 위원회 의석의 약 3분의 2를 차지하며 공의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었다. 이 사건은 "라인 강이 테베레 강으로 흘러들기 시작했다"는 말로 표현되기도 했다. 이후 공의회에서는 단순히 교황청이 제시한 안을 승인하는 방식이 아니라, 참가자들이 그룹을 이루어 주체적으로 토론을 진행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주요 초안 논의위원회 구성 직후, 프링스 추기경 등 진보파의 요구에 따라 가장 개혁적인 내용으로 평가받던 전례에 관한 초안이 첫 번째 의제로 상정되었다.

  • 전례 초안: 10월 22일부터 논의된 이 초안은 전례 준비 위원회가 작성했으며, 8개 장으로 구성되었다. 주요 내용은 회중의 능동적 참여 증진, 미사 중 라틴어와 함께 자국어 부분적 사용 허용, 양형 영성체, 공동 집전, 지역 문화 적응, 주교회의로의 전례 권한 일부 이양 등 혁신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보수파는 특히 라틴어 사용 축소에 강하게 반발했지만, 15일간의 토론 끝에 실시된 원칙적 수용 여부 투표에서 2,215명 중 단 46명만이 반대표를 던져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이는 갱신을 위한 두 번째 승리로 평가되었다. 초안은 세부 수정을 위해 위원회로 다시 보내졌다.

  • 계시 초안: 보수적인 신학 위원회가 작성한 이 초안은 성경 외에도 전통 안에 계시된 진리가 존재하며, 성경의 모든 주장은 오류가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개혁파는 이에 강하게 반발했다. 6일간의 격론 끝에 11월 20일 실시된 투표에서 초안 거부 의견이 1,360표, 수용 의견이 822표로 나왔다. 이는 거부에 필요한 3분의 2 과반수에 102표가 부족한 결과였고, 공의회는 참가자 62%가 거부한 초안에 대한 논의를 계속해야 하는 교착 상태에 빠졌다. 다음 날인 11월 21일, 교황 요한 23세가 개입하여 이 초안을 보수적 성향의 교리 위원회와 쇄신적 성향의 그리스도인 일치 사무국 대표들로 구성된 특별 합동 위원회에서 수정하도록 지시했다. 이는 쇄신을 위한 세 번째 승리이자 공의회의 중요한 전환점으로 평가받았다.

  • 현대 통신 수단 초안: 이 초안은 교회가 미디어를 활용하여 사명을 증진하고, 미디어의 유해성으로부터 사람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비교적 논란이 적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 11월 27일, 공의회는 이 초안의 필수 원칙만 남기고 세부 사항은 추후 다루기로 결정하며 원칙적으로 수용하고 요약을 위해 위원회로 돌려보냈다.

  • 동방 교회와의 일치 초안: 동방 교회 준비 위원회가 작성한 이 초안은 가톨릭과 동방 정교회 간의 차이를 축소했다는 보수파의 비판과, 일치를 정교회의 가톨릭 복귀로만 이해했다는 개혁파의 불만을 동시에 샀다. 결국 공의회 교부들은 투표를 피하고, 이 초안을 기독교 일치에 관한 다른 두 문서와 병합하도록 결정했다.

  • 교회 초안: 제1회기 마지막 주간인 12월 1일부터 논의된 이 초안은 당시 신학 교과서의 법률적 교회관을 반영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로마 가톨릭 교회와 동일하며, 주교는 교황의 권위에 참여해야만 보편 교회에 대한 권한을 가지며, 신자들의 사제직은 비유적일 뿐이라는 등의 주장을 담았다. 칼 라너, 에드워드 실레벡스 등 개혁 신학자들은 상세한 비판서를 배포하며 강하게 반발했다. 이전 투표들에서 나타난 쇄신 경향을 고려할 때 이 초안의 부결 가능성이 높았다. 투표를 앞두고 교황 요한 23세는 지금까지의 초안들이 너무 방대하고 '아지오르나멘토(aggiornamento, 쇄신)' 정신이 부족하다고 지적하며 개입했다. 그는 모든 초안의 분량을 줄이고 자신의 개막 연설 비전을 더 잘 반영하도록 재작업을 감독할 특별 위원회를 임명했다. 이로써 제1회기는 마무리되었다.

4. 2. 제2회기 (1963년 9월 29일 ~ 12월 4일)

제1회기 종료 후 공의회 초안 검토와 논의가 정리되던 중, 1963년 6월 3일 요한 23세가 암 투병 끝에 공의회 마무리를 보지 못하고 선종하였다. 6월 21일 콘클라베에서 밀라노 대교구장 조반니 바티스타 몬티니 추기경이 후임 교황으로 선출되어 바오로 6세가 되었고, 다음 날인 6월 22일 라디오 메시지를 통해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지속을 공식 선언했다.

바오로 6세는 제2회기를 1963년 9월 29일에 개회할 것을 예고했고, 이에 따라 전 세계의 공의회 교부들은 다양한 초안 연구를 재개했다. 특히 8월 26일부터 29일까지 독일 풀다에서는 유럽 주교 연합 주도로 제2회기의 진행 방식을 준비하기 위한 회의(풀다 회의)가 열렸다.

제2회기 개회에 앞서 9월 12일, 바오로 6세는 공의회 운영 방식에 몇 가지 중요한 변화를 지시했다. 4명의 운영 위원(moderatores)을 새로 두어 공의회 진행을 이끌도록 했는데, 이들 중 3명(되프너, 수엔넨스, 레르카로)은 진보 성향으로 평가받아 공의회의 개혁 동력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었다. 나머지 1명은 중도 성향의 아가지니안 추기경이었다. 이 조치는 교황청의 직접적인 개입을 줄이고 공의회 자체의 주도성을 높이려는 의도로 해석되었다. 또한, 공의회 의장단 정원을 10명에서 12명으로 늘리고 그 역할을 절차적 문제로 한정했으며, 비(非)그리스도교와의 대화를 위한 사무국과 홍보 위원회를 신설했다. 일반 신도 대표와 비가톨릭 참관인의 참여도 확대되었다.

1963년 9월 29일, 제2회기가 개회되었다. 개회 연설에서 바오로 6세는 공의회가 집중해야 할 4가지 주요 목표를 제시했다. 이는 교회 자체에 대한 이해 심화 (교회론), 교회의 내적 쇄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 증진 (에큐메니즘), 그리고 교회와 현대 세계와의 대화였다.

제2회기 동안 공의회 교부들은 교황이 제시한 목표들을 중심으로 다양한 주제의 초안들을 논의했다. 주요 논의 대상에는 교회, 주교의 역할, 종교의 자유, 비그리스도교 종교와의 관계, 하느님의 계시, 평신도 사도직, 사제직, 동방 가톨릭교회, 교회의 선교 활동, 수도 생활, 사제 양성, 그리스도교 교육 등이 포함되었다. 제1회기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초안들이 수정되거나 새로운 방향으로 논의되었다.

1963년 12월 4일, 제2회기는 두 개의 중요한 문서를 최종 승인하고 반포하며 마무리되었다. 하나는 미사와 성사 집전 방식 등 가톨릭 전례의 대대적인 개혁 방향을 제시한 전례 헌장(Sacrosanctum Concilium|사크로상툼 콘칠리움la)이었고, 다른 하나는 신문, 방송, 영화 등 현대 사회의 다양한 대중 매체를 복음 선포에 활용하고 그 영향력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정리한 사회 홍보 수단에 관한 교령(Inter Mirifica|인테르 미리피카la)이었다. 이 두 문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구한 변화와 쇄신의 구체적인 첫 결실로 평가받는다.

4. 3. 제3회기 (1964년 9월 14일 ~ 11월 21일)

제3회기는 1964년 9월 14일부터 11월 21일까지 열렸다. 이 기간 동안 공의회 교부들은 교회, 주교의 역할, 종교 자유, 비그리스도교 종교와의 관계, 계시, 평신도 사도직, 사제직, 동방 가톨릭 교회, 선교 활동, 수도 생활 쇄신, 사제 양성, 기독교 교육, 현대 세계 속에서의 교회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한 초안을 심도 깊게 논의했다.

특히 이 회기에서는 공의회의 중요한 문서들이 결실을 보았다.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해 다룬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루멘 겐티움)이 공포되었으며, 이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핵심적인 성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또한, 동방 가톨릭 교회의 고유한 전통과 권리를 존중하고 확인하는 동방 가톨릭 교회들에 관한 교령(Orientalium Ecclesiarum)과 다른 그리스도교 교파와의 일치 운동(에큐메니즘)을 추구하는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Unitatis Redintegratio)이 채택되어 반포되었다. 이러한 문서들은 가톨릭 교회가 세상과 다른 종교 및 교파들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다.

4. 4. 제4회기 (1965년 9월 14일 ~ 12월 8일)

1965년 9월 14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마지막 회기인 제4회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점까지 아직 11개의 초안이 최종 결의에 이르지 못한 상태였다. 특히 현대 세계와 교회의 관계를 다룬 "초안 13"(훗날 현대 세계 헌장으로 성립)과 『종교 자유 선언』 초안은 여러 차례 수정되었음에도 여전히 합의점을 찾지 못한 중요 안건이었다.

회기 시작 직후인 9월 15일, 교황 바오로 6세는 교회의 중요한 결정 과정에 주교들의 참여를 확대하기 위한 주교 시노드(Synod) 창설을 발표했다. 이는 공의회의 정신을 이어받아 공의회 이후에도 전 세계 각지에서 정기적으로 열리며 현대 가톨릭 교회의 중요한 기구로 자리 잡았다.

제4회기에서는 계시의 해석 문제를 둘러싸고 논쟁이 있었던 『계시 헌장』(Dei Verbumlat)이 마침내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이를 기점으로 다른 주요 문서들도 연이어 성립되었다.

  • '''주요 논의 및 문서 반포 일정'''
  • * 9월 21일 ~ 10월 8일: 현대 세계에서의 교회에 관한 초안 토론.
  • * 10월 7일 ~ 12일: 선교 활동에 관한 새로운 초안 토론.
  • * 10월 28일: 다음 문서들이 반포되었다.
  • ** 『수도 생활 교령』 (Perfectae Caritatislat)
  • ** 『사제 양성 교령』 (Optatam Totiuslat)
  • ** 『주교 교령』 (Christus Dominuslat)
  • ** 『교육 선언』 (Gravissimum Educationislat)
  • * 11월 18일: 다음 문서들이 반포되었다.
  • ** 『계시 헌장』 (Dei Verbumlat)
  • ** 『평신도 교령』 (Apostolicam Actuositatemlat)
  • * 12월 7일: 다음 문서들이 반포되었다.
  • ** 『종교 자유 선언』 (Dignitatis Humanaelat)
  • ** 『선교 교령』 (Ad Genteslat)
  • ** 『사제 생활 교령』 (Presbyterorum Ordinislat)
  • ** 『현대 세계 헌장』 (Gaudium et Speslat): 가장 많은 논의를 거쳤던 이 문서는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담고 있으며, 12월이 되어서야 최종적으로 성립되었다.
  • ** 『비그리스도교 선언』 (Nostra Aetatelat)


같은 날인 12월 7일,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는 1054년 교회 대분열 이후 천 년 가까이 이어져 온 상호 파문을 공식적으로 철회하는 역사적인 공동 선언을 발표했다. 이는 교회 일치 운동의 중요한 진전으로 평가받는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이날 공의회 폐회 연설을 통해 공의회의 성격을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러나 여기서 다음 사항에 주의해야 합니다. '''교회는 특별한 교도권을 통해 특별한 교리를 정의하지 않았습니다'''만, 많은 문제에 대해 현대인의 양심의 기준이 되고 행동의 원리가 되는 사항을 권위로써 가르쳤습니다. 게다가 교회는 '''현대인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항상 자신의 권위와 힘을 유지하면서 사목적 사랑에 특유한 '''친절하고 우호적인 태도를 취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교회에 귀 기울이고 교회를 이해하기를 바랐습니다. 그 때문에 지식 계층 사람들만이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 아닌, 보통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표현을 사용했습니다. 더욱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해, 생활 체험이나 사람들의 마음에 호소했습니다. 즉, '''교회는 있는 그대로의 현대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다음 날인 12월 8일,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폐막식을 통해 교황 바오로 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종료를 공식 선언하고 전 세계를 향한 메시지를 발표하며 4년에 걸친 대장정의 막을 내렸다.

5. 공의회의 주요 문헌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총 4번의 회기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역대 보편공의회 가운데 가장 큰 규모(참가자 2,800명)였고 가장 많은 문서(16개)를 생산했다.[2] 이 공의회의 가르침은 전 세계 로마 가톨릭교회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공의회에서 확정된 16개의 문서는 그 중요성과 대상에 따라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나뉜다.


  • '''헌장'''(constitutio|콘스티투티오lat): 총 4개의 헌장은 교회 전체를 위해 매우 중요한 기본 원칙과 교리를 다룬다.
  • '''교령'''(decretum|데크레툼lat): 총 9개의 교령은 교회 내의 특정 집단이나 특정 주제에 대한 구체적인 지침과 규정을 담고 있다.
  • '''선언'''(declaratio|데클라라티오lat): 총 3개의 선언은 특정 문제에 대한 교회의 원칙적인 입장과 태도를 밝히는 문서이다.

5. 1. 헌장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총 16개의 문서를 확정했으며, 이 가운데 4개는 교회 전체를 위해 매우 중요한 '''헌장'''(constitutio|콘스티투티오la)이다. 나머지 문서는 특정 주제나 집단을 다루는 9개의 '''교령'''(decretum|데크레툼la)과 3개의 '''선언'''(declaratio|데클라라티오la)이다. 4개의 헌장은 다음과 같다.

  • '''거룩한 공의회''' (''Sacrosanctum Concilium'',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 1963년 12월 4일 반포)
  • 이 헌장은 전례(경배)가 교회 생활의 중심임을 설명한다. 전례의 거룩한 본문과 예식들은 그것들이 의미하는 거룩한 내용을 더욱 명료하게 표현하도록 개선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어려움 없이 이해하고, 충만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여 진정한 공동체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 '''인류의 빛''' (''Lumen gentium'',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 1964년 11월 21일 반포)
  • 교회가 자기 자신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설명하는 헌장이다.
  • 제1장(교회의 신비)은 교회가 신적이면서 동시에 인간적인 공동체임을 제시한다.
  • 제2장(하느님의 백성)은 교회가 단순히 가톨릭 신자뿐만 아니라 선의를 지닌 모든 사람, 즉 '하느님 백성'을 포용함을 밝힌다.
  • 제3장(교회의 위계조직, 특히 주교직)은 교황의 지도 아래 전 세계의 주교들이 교회의 사업을 위해 집단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점을 설명한다.
  • 제4장(평신도)은 교회 내에서 평신도의 역할을 매우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다룬다.
  • 제5장(교회의 보편적 성화 소명)은 모든 사람이 성덕으로 부름받았음을 강조한다.
  • 이후 제6장(수도자)에서는 수도회 생활을, 제7장(순례하는 교회의 종말론적 성격, 그리고 천상 교회와 그 일치)에서는 지상에서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교회의 여정을, 제8장(그리스도와 교회 안에 계시는 천주의 성모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서는 성모 마리아의 역할을 설명한다.

  • '''하느님의 말씀''' (''Dei verbum'',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 1965년 11월 18일 반포)
  • 하느님이 어떻게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시는지(계시)에 대한 교회의 가르침을 명확히 한다. 이 계시는 성경 안에 문자로 기록되어 전해지며, 또한 구전(口傳)을 통해 교회의 성전(聖傳)의 일부로 이어진다. 헌장은 성경과 성전이 모두 동일한 신적 원천에서 비롯된다고 가르친다.

  • '''기쁨과 희망''' (''Gaudium et spes'',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1965년 12월 7일 반포)
  • 이 헌장은 전 세계 모든 사람을 대상으로 하며, 인간 존엄성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현대 사회가 직면한 주요 문제들에 대한 해결책을 찾기 위해 교회가 다른 모든 이들과 협력하고자 하는 진지한 노력을 설명한다.

5. 2. 교령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 전체를 위한 4개의 헌장과 특정 주제를 다루는 9개의 교령, 그리고 3개의 선언을 포함하여 총 16개의 문서를 발표했다. 9개의 교령은 주교의 사목직, 교회일치운동, 동방 가톨릭교회, 사제의 직무와 생활, 사제 양성, 수도생활의 쇄신, 교회의 선교 활동, 평신도의 사도직, 대중 매체 등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각 교령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라틴어 명칭한국어 명칭주요 내용
Inter mirificalat사회 매체에 관한 교령 (놀라운 기술)대중 매체(미디어)의 중요성과 도덕적 사용, 교회의 활용 방안 등을 다룬다.
Orientalium Ecclesiarumlat동방 가톨릭 교회들에 관한 교령 (동방 교회들)동방 가톨릭교회의 고유한 전례와 관습, 자치권 등을 존중하고 보존할 것을 다룬다.
Unitatis redintegratiolat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일치의 재건)교회일치운동(에큐메니즘)의 원칙과 방향을 제시하고, 개신교, 정교회 등 다른 그리스도교 공동체와의 관계 개선 및 일치 노력을 다룬다.
Christus Dominuslat주교들의 사목 임무에 관한 교령 (주님이신 그리스도)주교의 역할과 임무, 교구 운영, 다른 주교들과의 협력(주교회의) 등을 다룬다.
Perfectae caritatislat수도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령 (완전한 사랑)수도회의 생활을 현대 세계에 맞게 쇄신하고 적응시키는 방안, 청빈, 정결, 순명의 복음적 권고 등을 다룬다.
Optatam totiuslat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 (온 교회의 열망)사제 양성 과정의 개선, 신학교 교육 내용(특히 성경 연구 강조) 및 영성 지도 강화 등을 다룬다.
Apostolicam actuositatemlat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사도직 활동)평신도가 교회와 세상 안에서 수행하는 고유한 사도직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복음화와 사회 참여를 독려한다.
Ad genteslat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 (만민에게)교회의 선교 활동의 본질과 중요성을 재확인하고, 복음화 방법, 현지 문화 존중 및 적응 등을 다룬다.
Presbyterorum ordinislat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 (사제품)사제의 역할과 직무, 영성 생활, 평신도와의 관계, 독신 생활의 의미 등을 다룬다.


5. 3. 선언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채택된 16개의 주요 문서 중 3개는 특정 주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밝히는 선언이다. 이 선언들은 그리스도교 교육, 비그리스도교와의 관계, 종교의 자유 등 중요한 현대적 문제들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제시함.

라틴어 명칭한국어 명칭핵심 주제반포일
Gravissimum educationis그리스도인 교육에 관한 선언그리스도인 교육, 학교, 부모 권리1965년 10월 28일
Nostra aetate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비그리스도교 관계, 유대교, 반유대주의 비판1965년 10월 28일
Dignitatis humanae종교 자유에 대한 선언종교 자유, 양심의 자유, 국가 역할1965년 12월 7일


  • '''교육의 중대성''' (''Gravissimum educationis''): 그리스도인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이가 교육받을 권리가 있음을 천명함. 특히 가톨릭 학교의 역할과 교육에 대한 부모의 우선적 권리, 그리고 국가의 지원 필요성 등을 다룸. 1965년 10월 28일에 반포됨.
  • '''우리 시대''' (''Nostra aetate''): 가톨릭교회가 비그리스도교, 특히 유대교와의 관계를 어떻게 바라보는지에 대한 입장을 밝힌 선언임. 타 종교 안에도 진리와 거룩함의 씨앗이 존재함을 인정하고 존중과 이해를 촉구하며, 유대교에 대한 오랜 편견을 반성하고 반유대주의를 명확히 비판하는 내용을 담고 있음. 이는 종교 간 대화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는 평가를 받음. 1965년 10월 28일에 반포됨.
  • '''인간 존엄성''' (''Dignitatis humanae''): 모든 인간은 그 존엄성에 따라 양심의 자유를 가지며, 이에 따라 종교의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음을 천명함. 어떠한 인간적 권력도 개인의 종교적 신념을 강요하거나 방해해서는 안 되며, 국가는 시민의 종교 자유를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음을 강조함. 이는 교회가 인간의 존엄성과 기본권을 옹호하는 중요한 선언으로 여겨짐. 1965년 12월 7일에 반포됨.

6. 공의회의 영향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4회기에 걸쳐 로마에서 개최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제21차 보편공의회로, 역대 공의회 중 가장 큰 규모(참가자 약 2,800명)였으며 가장 많은 결과물(16개의 중요 문서)을 남겼다. 이 공의회의 결정과 가르침은 전 세계 가톨릭 교회에 매우 깊고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공의회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된 16개의 문서는 그 성격에 따라 크게 세 종류로 나뉜다.


  • '''헌장'''(憲章, Constitution): 4개의 헌장은 교회 전체의 근본적인 가르침을 다루는 가장 중요한 문서이다.
  • '''교령'''(敎令, Decretum): 9개의 교령은 교회 내 특정 집단이나 특정 주제에 관한 구체적인 지침과 방향을 제시한다.
  • '''선언'''(宣言, Declaration): 3개의 선언은 특정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천명한다.


특히 4개의 헌장은 공의회의 핵심 정신을 담고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 '''교회 헌장 (인류의 빛, Lumen Gentium|루멘 겐티움la, 1964. 11. 21.)''': 교회가 스스로의 본성을 어떻게 이해하는지를 설명한다.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제시하며, 주교단의 역할과 평신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모든 이의 성화 소명을 밝히며, 성모 마리아의 역할에 대해 다룬다.
  • '''계시 헌장 (하느님의 말씀, Dei Verbum|데이 베르붐la, 1965. 11. 18.)''': 하느님이 어떻게 자신을 인간에게 드러내시는지(계시)에 관한 교리를 설명한다. 계시가 성경과 성전(거룩한 전승)을 통해 전달됨을 밝힌다.
  • '''전례 헌장 (거룩한 공의회, Sacrosanctum Concilium|사크로상툼 콘칠리움la, 1963. 12. 4.)''': 전례가 교회 생활의 정점임을 강조하며, 신자들이 전례의 의미를 더 잘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전례 예식의 개혁 방향을 제시했다. 이는 이후 각국 언어 미사 도입 등 구체적인 변화로 이어졌다.
  • '''사목 헌장 (기쁨과 희망, Gaudium et Spes|가우디움 에트 스페스la, 1965. 12. 7.)''': 현대 세계 안에서 교회의 역할과 사명을 다룬다. 인간 존엄성을 강조하고, 당대의 주요 문제(전쟁과 평화, 사회 정의, 문화, 가정 등)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밝히며 세상과의 대화와 협력을 촉구한다.


이 외에도 9개의 교령은 주교의 사목 임무, 교회일치운동, 동방 가톨릭교회, 사제의 직무와 생활 및 양성, 수도생활의 쇄신, 교회의 선교 활동, 평신도의 사도직 활동, 사회 커뮤니케이션 매체(대중매체) 활용 등에 대한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했다. 3개의 선언은 그리스도교 교육, 교회의 비그리스도교 종교들에 대한 입장, 종교의 자유에 관한 원칙을 천명했다.

이러한 공의회 문헌들은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가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중요한 이정표가 되었으며, 전례, 교회 구조, 타 종교 및 현대 사회와의 관계 등 교회 생활 전반에 걸쳐 지속적인 쇄신과 변화를 이끌어내는 원동력이 되었다.

6. 1. 긍정적 영향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로마 가톨릭교회 역사상 중요한 전환점으로, 교회 안팎에 걸쳐 광범위하고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공의회의 결정들은 교회의 현대화와 개방성을 증진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전례 개혁과 신자 참여 증대

  •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전례 개혁이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수백 년간 라틴어로만 봉헌되던 미사를 각 나라의 언어로 거행할 수 있게 하여 신자들이 더욱 능동적으로 전례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이는 『전례 헌장』(Sacrosanctum Concilium)의 정신에 따른 것으로, 전례가 신앙생활의 중심임을 재확인하고 신자들의 이해와 참여를 높이는 것을 목표로 했다.[135][136]
  • 미사 집전 방식에도 변화가 생겨, 사제가 제단을 등지고 신자들을 바라보며 미사를 집전하는 방식이 도입되었다. 이는 사제와 신자 간의 소통을 강화하고 공동체성을 강조하기 위한 조치였다. 다만, 전통적인 방식(사제가 신자와 함께 제단을 바라보는 자세)이 명시적으로 금지된 것은 아니다.
  • 이전에는 남성만 가능했던 복사 직무에 소녀들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교회 일치 운동과 종교 간 대화 증진

  • 공의회는 다른 기독교 교파와의 관계 개선에도 큰 진전을 이루었다. 1517년 종교개혁 이후 분리된 개신교 신자들을 '열교' 대신 '분리된 형제'라는 존중의 표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이는 과거의 적대감을 넘어서 화해와 일치를 추구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중요한 변화였다.
  • 1054년 교회 분열로 갈라섰던 동방정교회와의 관계도 크게 개선되었다. 공의회 기간 중인 1965년 12월 7일, 로마 가톨릭교회와 동방정교회는 900년 이상 지속된 상호 파문을 공식적으로 철회하며 역사적인 화해를 이루었다.
  • 비(非)그리스도교 종교에 대한 태도 역시 크게 변화했다.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Nostra aetate) 등을 통해 다른 종교에도 진리와 성스러움의 요소가 존재함을 인정하고, 상호 이해와 존중을 바탕으로 한 대화를 강조했다. 이는 종교 간 평화와 협력을 위한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교회관의 변화와 평신도 역할 강조

  • 『교회 헌장』(Lumen Gentium)은 교회의 본질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교회를 성직자 중심의 위계 조직으로만 보던 시각에서 벗어나, 모든 세례 받은 신자들이 동등하게 '하느님의 백성'을 구성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 평신도의 역할과 중요성이 재조명되었다. 평신도 역시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세상을 성화시키는 고유한 사명을 지니고 있음을 인정하며, 교회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독려했다. 이는 교회의 문턱을 낮추고 모든 신자가 교회의 주체임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 모든 신자가 성덕으로 부름받았다는 '보편적 성화 소명'을 강조하여, 성직자나 수도자뿐만 아니라 평신도 역시 일상생활 속에서 거룩함을 추구해야 함을 일깨웠다.

사회 참여와 예언자적 사명 강조

  • 공의회는 교회가 세상과 담을 쌓고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함을 강조했다. 『사목 헌장』(Gaudium et Spes)은 현대 세계의 여러 문제(전쟁과 평화, 가난과 불의, 과학 기술 발전 등)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표명하고, 인류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에 동참하며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건설하는 데 기여해야 할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역설했다.
  • 특히 사회적 불의에 맞서 하느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약자들의 편에 서는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이 강조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에 교회가 소극적으로 대처했다는 반성[134]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후 해방 신학 등 교회의 사회 참여 운동에 큰 영향을 미쳤다.[135][136]

성경 연구 장려

  • 『계시 헌장』(Dei Verbum)을 통해 성경의 중요성을 재확인하고, 모든 신자들이 성경을 더욱 가까이하고 깊이 연구하도록 권장했다. 이전까지 성직자 중심으로 이루어지던 성경 연구와 해석의 문턱을 낮추고, 각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고 보급하는 일을 장려하여 신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더욱 풍부하게 접할 수 있도록 했다.

주교단의 역할 강화와 시노드 창설

  •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강조된 교황 수위권에 더하여, 전 세계 주교들이 교황과 함께 교회를 이끌어가는 '주교단'(Collegiality)의 개념이 강조되었다. 이는 교회의 의사 결정 구조에 있어 분권화와 참여를 확대하는 의미를 지닌다.
  • 공의회 정신을 지속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후속 조치로 1965년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주교 시노드가 창설되었다. 시노드는 세계 각 지역의 주교 대표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교회 현안을 논의하고 교황에게 자문하는 기구로, 공의회의 정신을 이어가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공의회 정신의 계승과 실현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신은 이후 여러 교황들의 노력과 후속 문헌 및 조치들을 통해 구체적으로 실현되어 갔다.

  • 서품, 미사, 세례, 견진, 고해성사, 병자성사, 혼인 등 주요 성사 예식이 개정되어 공의회의 정신을 반영했다.
  • 새로운 전례력과 성무일도가 발표되어 전례 생활의 쇄신을 이끌었다.
  • 1983년에는 공의회의 정신을 반영한 새로운 교회법이 반포되었다.
  • 묵주 기도에 '빛의 신비'가 추가되는 등 신심 생활에도 변화가 있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단순히 교리적 논의에 그치지 않고, 실제 교회의 삶과 활동 전반에 걸쳐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공의회는 교회가 시대의 징표를 읽고 세상과 소통하며 끊임없이 쇄신해야 한다는 중요한 가르침을 남겼다.

6. 2. 부정적 영향 및 논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로마 가톨릭교회 내외에 큰 변화를 가져왔지만, 공의회 진행 과정과 결정 사항들에 대해 내부적으로 상당한 신학적 논쟁과 이견이 존재했다. 특히 전통적인 교리와 관행을 중시하는 보수적인 교부들과 변화와 쇄신을 추구하는 진보적인 교부들 사이의 입장 차이가 여러 쟁점에서 드러났다.

=== 공의회 내부의 주요 논쟁 ===

공의회, 특히 제2회기(1963년)에서는 주요 문헌들의 초안을 둘러싸고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 주교의 권한과 사도단성 ====

교회 헌장 초안, 특히 '교회의 계층 구조' 장(章)은 제2회기에서 가장 큰 논쟁거리 중 하나였다.[36] 핵심 쟁점은 주교의 권한이 어디서 비롯되는지와 교황과의 관계 설정이었다. 전통적인 관점은 주교가 교황으로부터 통치 권한을 위임받으며, 그 권한은 자신의 교구에 한정된다는 것이었다. 반면, 새로운 초안은 주교의 권한이 서품 자체에서 나오며, 모든 주교가 교황과 더불어 전체 교회를 다스리는 '사도단'(collegium apostolorumla)을 형성한다고 제안했다.

보수적인 교부들은 이러한 '사도단성'(collegialitas|콜레지알리타스la) 개념이 교황의 수위권을 약화시키며, 제1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정의된 교황의 절대적 권위와 충돌한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그들은 교회가 베드로 위에만 세워졌다고 주장하며, 주교단의 집단적 권위는 성경적 근거가 부족하다고 비판했다. 이 논쟁은 10월 30일 5개 명제에 대한 투표로 이어졌다. 주교 서임이 성사의 최고 단계라는 점(찬성 2,123표, 반대 34표)이나 주교단이 사도단의 후계자라는 점(찬성 2,154표, 반대 104표) 등은 압도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주교단이 교황과의 일치 속에서 보편 교회에 대한 완전하고 최고의 권한을 갖는다는 명제(찬성 2,148표, 반대 336표)와 주교단의 권위가 교황의 위임이 아닌 신적 기원에서 비롯된다는 명제(찬성 2,138표, 반대 408표)에 대해서는 각각 상당수의 반대표가 나왔다. 이는 사도단성 개념이 당시 많은 주교에게 생소했거나 논란의 여지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 종신 부제직 부활 ====

같은 장에서 부제직을 영구적인 서품 직무로 회복하고, 특히 기혼 남성에게도 개방할 수 있다는 제안 역시 논란을 일으켰다. 서품된 성직자가 결혼 상태에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 자체가 일부 보수적인 교부들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충격적인 제안이었다. 10월 30일 투표에서 부제직 회복을 고려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명제는 찬성 2,120표를 얻었으나, 반대표도 525표에 달해 약 25%의 교부들이 이에 반대했음을 알 수 있다.

==== 평신도의 역할 ====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장(章) 역시 논쟁의 대상이었다. 이 장은 모든 세례받은 신자가 그리스도의 사제직, 예언자직, 왕직에 참여하며, '신자들의 감각'(sensus fideliumla)을 지니고, 세속적인 활동을 통해서도 성화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또한 교회의 무류성(infallibilitas|인팔리빌리타스la)이 교황과 주교뿐 아니라 하느님의 백성 전체의 카리스마(χάρισμα|카리스마el)임을 시사했다.

이에 대해 보수적인 교부들은 이 장이 평신도성직자 사이의 본질적인 차이를 모호하게 만들고, 모든 신자가 사제라는 개신교의 '만인사제설'과 유사한 주장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 공의회 운영 방식 ====

공의회 운영 방식 자체에 대한 논란도 있었다. 제2회기 시작 전, 교황 바오로 6세는 공의회 운영을 위해 4명의 운영 위원(moderatores|모데라토레스la)을 임명했는데, 이들 중 3명(되프너, 수엔넨스, 레르카로 추기경)이 진보 성향으로 분류되어 사실상 공의회의 주도권이 진보파에게 넘어갔다는 평가가 있다. 이는 교황청 관료들의 개입을 줄이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또한, 공의회 위원회 위원을 증원할 때에도 진보 성향의 '세계 동맹' 소속 주교들이 추가로 선출되면서, 보수적인 입장을 가진 교부들 사이에서는 공의회 논의가 특정 방향으로 치우치는 것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기도 했다.

=== 전례 개혁과 관련된 논란 ===

공의회 이후 가장 가시적인 변화는 전례 개혁이었다. 미사에서 라틴어 사용이 줄고 각국 언어가 도입되었으며, 사제가 신자들을 마주 보고 미사를 집전하는 방식이 일반화되었다. 또한, 진혼 미사에서 진노의 날(Dies Irae)과 같은 일부 속창(sequentia|세퀜티아la)이 제외되었는데, 이는 가사가 지나치게 최후의 심판에 대한 공포를 강조하여 본래의 기독교 정신에서 벗어났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이러한 변화들은 많은 신자들에게 환영받았지만, 일부 전통을 중시하는 가톨릭 신자들과 성직자들 사이에서는 공의회의 정신과 전례 개혁이 가톨릭 교회의 오랜 전통과의 단절이라는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 이는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 내부에 지속적인 긴장과 논쟁의 요인이 되었다.

6. 3. 한국 천주교회에 미친 영향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 세계 로마 가톨릭교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며, 이는 한국의 천주교회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공의회의 정신인 '아조르나멘토'(aggiornamento, 현대화)는 한국 천주교회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나아가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전례 분야에서 나타났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 라틴어로만 봉헌되던 미사가 각 나라의 언어로 거행될 수 있도록 허용됨에 따라, 한국에서도 한국어 미사가 봉헌되기 시작했다. 이는 신자들이 미사 전례를 더 쉽게 이해하고 능동적으로 참여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또한, 사제가 제단을 등지고 미사를 집전하던 방식에서 신자들을 마주보고 집전하는 방식으로 변화하여 사제와 신자 간의 소통을 강조했다. 소녀들도 복사를 설 수 있게 된 것 역시 전례 참여의 폭을 넓힌 변화 중 하나이다.

교회일치운동과 타 종교와의 관계에서도 중요한 진전이 있었다. 종교개혁으로 갈라선 개신교를 '열교'로 지칭하던 것에서 '분리된 형제'로 표현을 바꾸며 존중의 자세를 보였다. 또한 1054년 교회 분열 이후 오랫동안 단절되었던 동방정교회와의 관계 개선을 모색하고 화해의 길을 열었다.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대한 선언을 포함한 공의회 문서는 다른 종교에도 진리와 선함의 요소가 있음을 인정하고, 상호 이해와 대화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한국 사회의 다종교 상황 속에서 천주교회가 타 종교와 평화롭게 공존하고 협력하는 토대를 마련하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교회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인식도 높아졌다. 공의회는 교회가 세상의 문제에 무관심해서는 안 되며, 특히 사회적 불의에 맞서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함을 강조했다.[134][135][136] 이는 이후 한국 천주교회가 민주화 운동 등 사회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신학적 근거를 제공했다.

또한, 교회헌장(Lumen Gentium)에서는 평신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모든 신자가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증거하고 세상의 성화에 기여해야 할 책임과 역할을 지니고 있음을 명확히 했다. 이는 사제 중심의 교회 운영에서 벗어나 평신도들이 교회 활동에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처럼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전례, 교회일치운동, 사회 참여, 평신도 역할 등 다양한 측면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7. 공의회 해석 논쟁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가르침을 현대 사회에 맞게 새롭게 설명하고 전달하고자 했으나, 공의회 폐막 이후 그 의미와 결과를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일 것인가를 둘러싼 다양한 견해와 논쟁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공의회의 가르침을 쉽게 전달하려는 의도와 달리, 오히려 그 올바른 이해 방식과 해석이 중요한 문제로 떠오른 것이다.

특히 공의회 폐막 20주년이 되던 1985년, 훗날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되는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은 공의회 이후의 시기가 교회에 여러 어려움을 가져왔으며, 공의회의 본래 정신이 '공의회 정신'이라는 미명 아래 왜곡되고 있다는 강한 우려를 표명했다. 그는 공의회의 진정한 의미가 아직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을 수 있으며, 공의회 문서를 충실히 재독함으로써 그 참된 정신을 되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러한 해석 논쟁의 핵심에는 공의회를 과거와의 '단절'과 '불연속'으로 이해하려는 입장과, 교회의 오랜 전통 안에서 이루어진 '개혁'과 '연속성'으로 파악하려는 입장의 대립이 자리 잡고 있다.[131] 전자는 공의회를 통해 교회가 근본적으로 새로워졌다고 보며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는 반면, 후자는 공의회가 교회의 본질적인 가르침을 유지하면서 시대에 맞게 쇄신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 서로 다른 해석 방식은 공의회 이후 가톨릭 교회의 정체성과 나아갈 방향에 대한 논의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다.

7. 1. '단절'과 '불연속'의 해석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해석하는 방식에는 여러 관점이 존재하며, 그중 하나는 공의회 이전과 이후의 교회를 뚜렷하게 구분 짓는 '불연속과 단절에 의한 해석법'이다.[131] 이 입장은 베네딕토 16세가 2005년 12월 22일 로마 교황청 연설에서 제시한 두 가지 주요 해석법 중 하나로 소개되었다.[131]

이 해석법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마치 기존의 헌법을 폐지하고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헌법 제정 의회'와 유사하게 간주한다.[131] 즉, 공의회를 통해 모든 것이 근본적으로 새로워졌으며, 과거와의 단절을 강조하는 혁명적인 시각을 취하는 것이다.[131] 이러한 관점에서 공의회는 교회가 낡은 모습을 벗고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새로운 성령 강림"과 같은 결정적인 전환점으로 여겨진다.

'불연속' 해석법을 지지하는 이들은 공의회 이후 교회가 현대 사회와 소통하고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해서는 교황 수위권, 주교의 권한, 사제직과 독신 제도, 종교의 자유, 교회일치운동, 평신도의 역할 증대, 결혼과 성 윤리, 전례 방식 등 다양한 영역에서 과감한 혁신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이러한 혁신이야말로 공의회의 진정한 정신을 반영하며, 이를 기반으로 교회가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131]

더 나아가, 이 해석법은 공의회에서 최종적으로 발표된 공식 문서들이 실제로는 다양한 입장 간의 타협의 결과물일 뿐이며, 공의회가 추구했던 '진정한 정신'을 온전히 담아내지는 못했다고 평가하기도 한다.[131] 즉, 문서의 자구적 해석보다는 그 이면에 담긴 변화와 개혁의 동력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을 보인다. 이러한 입장을 대변하는 인물로는 마르티니 추기경[132]이나 하마오 후미오 추기경[133] 등이 있다.

7. 2. '개혁'과 '연속성'의 해석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내용을 이해하기 전에, 공의회를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먼저 다룰 필요가 있다. 공의회를 해석하는 관점에 따라 내용 이해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교회의 가르침을 현대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현대의 요구에 맞는 방법으로 탐구하고 설명"하고, "사목적 성격을 가진 교회의 교도 임무에 가장 잘 부합하는 표현법"을 사용하여 새로운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을 첫 번째 목표로 삼았다.

그러나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려 했던 공의회는 오히려 그 해석 방법을 둘러싸고 논란에 휩싸였다. 공의회 폐막 20주년이 되던 1985년, 당시 라칭거 추기경이었던 베네딕토 16세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제대로 이해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하며 우려를 표했다. 그는 지난 20년(1965~1985년)이 가톨릭 교회에 불리하게 작용했으며, 공의회 이후의 결과는 요한 23세바오로 6세를 포함한 모두의 기대를 저버렸다고 평가했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 20년(1965~85년)이 가톨릭 교회에 결정적으로 불리했다는 데에는 이견이 없다. 공의회에 이은 결과는 요한 23세와 바오로 6세를 비롯한 모두의 기대를 처참하게 배신한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인은 다시 고대 말기 이후 유례없는 소수파가 되었다. …공의회의 교황들과 교부들은 가톨릭적인 새로운 일치를 기대했지만, --바오로 6세의 말을 빌리자면-- 자기 비판에서 자기 파괴로 이어질 수 있는 불일치에 직면했다. …약진을 기대했지만 결과적으로 쇠퇴를 보여주었고, 그것은 공의회의 진정한 정신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자칭 '공의회 정신'의 구호 아래 만연해 갔다."


> "공의회의 본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앞으로의 큰 과제이다."


> "이 '진정한' 공의회에 대해, 실제로는 진정한 '반정신'인 거짓 '공의회 정신'이 대립했다. 이 치명적인 반공의회 정신--독일어로 말하면 Konzils-Ungeist--에 따르면, 모든 '새로운 것', 또는 새로운 것으로 추정되는 것은 지금까지 있었던 것, 또는 지금 있는 것보다 항상, 어떻든 좋은 것이다."


>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진정한 때는 아직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고, 그 진정한 수용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공의회 문서의 명문의 재독은 반드시 우리에게 그 진정한 정신을 재발견하게 할 것이다."

공의회가 폐회된 지 40년이 지난 후에도 교황이 된 베네딕토 16세는 여전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올바른 이해와 해석 문제를 제기했다.[131]

> "합당한 공의회 이해란 무엇입니까? 그리고 부적절하거나 잘못된 공의회 이해란 무엇입니까? 아직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교회의 상당 부분에서 공의회 실시가 어떤 의미에서 어려웠다는 것을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위대한 교회 박사 성 바실리오는 니케아 공의회 이후 교회의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하려고 하면, 이 말은 지난 40년 동안 일어난 일에 적용할 수 있습니다. 바실리오는 교회의 처지를 폭풍우 속에서 벌어지는 해전에 비유합니다. '의견이 대립하고 서로 반목하는 자들의 시끄러운 외침, 이해를 초월한 유언비어, 끊임없이 떠들어대는 혼란스러운 말소리--이것이 지금 거의 교회 전체를 채우고 과잉과 오류로 인해 신앙의 올바른 가르침을 왜곡하고 있습니다'.


> 우리는 공의회 이후의 상황에 이 극적인 묘사를 그대로 적용하고 싶지는 않지만, 모든 사건의 얼마간은 이 묘사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왜 교회의 많은 부분에서 지금까지 공의회 실시가 그렇게 어려웠습니까?


> 이 의문에 답하려면 무엇보다도 공의회의 올바른 해석이 필요합니다. 또는 오늘날 그렇게 말할 수 있다면, 적절한 해석법, 즉 공의회의 해석과 적용의 열쇠가 되는 올바른 방법이 필요합니다. 공의회 실시에서의 문제점은 두 개의 상반된 해석법이 서로 반목하고 논쟁하는 데서 비롯되었습니다."

베네딕토 16세에 따르면, 공의회 해석에는 두 가지 상반된 방식, 즉 '해석학'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불연속과 단절의 해석학"이다. 이 관점은 공의회 이전 교회와 이후 교회 사이의 단절을 강조하며, 공의회를 마치 새로운 헌법을 제정하는 혁명적인 사건처럼 간주한다.[131] 이 해석에 따르면 공의회는 모든 것을 새롭게 바꾼 "새로운 성령 강림"이며, 교회는 과거의 오점을 제거하고 완전히 새로 태어나야 한다. 이들은 공의회가 인간론을 중점적으로 다루면서 일종의 불연속이 발생했으며, 바오로 6세가 폐막 연설에서 언급한 "사람들에 대한 무한한 사랑"을 근거로 현대 세계에 맞춰 새로운 교회론을 구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교황 수위권, 주교의 권능, 사제직과 독신 제도, 종교의 자유, 에큐메니즘, 하느님 백성의 역할, 결혼과 성 도덕, 전례 등 여러 분야에서 근본적인 변화, 즉 '혁신'이 필요하며, 이것만이 공의회의 진정한 정신이라고 여긴다. 이들은 공의회 문서 자체는 여러 세력 간의 타협의 산물이므로[131] 공의회의 진정한 정신을 온전히 담고 있지 않다고 보기도 한다.[132][133]

두 번째는 "개혁의 해석학"이다. 이 관점은 교황 요한 23세가 1962년 10월 11일 공의회 개회 연설에서 처음 제시했고, 교황 바오로 6세가 1965년 12월 7일 폐회 연설에서 다시 확인한 해석법이다. 베네딕토 16세는 이 해석법을 지지하며 요한 23세의 말을 인용하여 설명했다.[131]

> "공의회가 바라는 것은 '교리를 약화시키거나 왜곡하는 일 없이 순수하고 완전한 방식으로 전달하는 것'입니다. 교황은 이어서 '우리의 임무는 골동품 취미처럼 이 고귀한 보물을 지키는 것만이 아닙니다. 우리의 임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활동에 성실하고 두려움 없이 임하는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필요한 것은 '교회의 모든 가르침을 완전하고 정확하게 지키는 것입니다.' 이 일은 '정통 교리와의 충실하고 완전한 일치 내에서 드러납니다. 그러나 교리는 다양한 연구 방법과 현대 사상의 다양한 문학적 형태를 통해 연구되고 확대되어야 합니다. 신앙 유산에 담긴 고대 교리의 실체와 동일한 의미와 메시지를 유지하면서, 그 교리를 제시하는 방법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이 해석법은 교회의 근본적인 가르침과 전통은 변하지 않지만(연속성), 시대의 변화에 맞춰 그 표현 방식과 실천 방법을 새롭게 해야 한다(개혁)는 입장을 취한다. 베네딕토 16세는 이러한 '개혁의 해석학'이야말로 공의회의 진정한 정신을 반영하며, 교회가 나아가야 할 올바른 길이라고 보았다.

8. 결론

교황 바오로 6세가 공의회의 개회 입장을 주재하는 모습. 추기경 알프레도 오타비아니(왼쪽), 추기경 카메를렝고 베네데토 알로이지 마셀라, 몬시뇰 엔리코 단테 (후에 추기경이 됨), 교황 의전 실장 (오른쪽), 그리고 두 명의 교황 귀족이 그를 보좌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1962년부터 1965년까지 총 4회기에 걸쳐 로마에서 개최된 로마 가톨릭교회의 '''제21차 보편공의회'''이다. 교황 요한 23세가 소집하고 교황 바오로 6세가 이어받아 폐회했으며, 약 2,800명의 참가자가 모여 역대 보편공의회 중 가장 큰 규모를 기록했다.

공의회는 총 16개의 중요한 문서를 생산했으며, 이는 교회의 가르침과 실천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다. 이 문서들은 크게 '''헌장'''('''憲章''', constitution), '''교령'''('''敎令''', decretum), '''선언'''('''宣言''', declaration)의 세 종류로 나뉜다.

  • '''헌장''': 4개의 헌장은 교회 전체를 위한 매우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 * 교회헌장(인류의 빛 Lumen Gentium: 교회의 본성,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주교단의 역할, 평신도의 사명, 모든 이의 성화 소명, 수도회의 역할, 교회의 종말론적 성격, 마리아의 역할 등을 다룬다.
  • * 계시헌장(하느님의 말씀 Dei Verbum: 하느님의 계시가 성서와 성전(전승)을 통해 어떻게 전달되는지를 설명한다.
  • * 전례헌장(거룩한 공의회 Sacrosanctum Concilium: 전례가 교회 생활의 중심임을 강조하며, 신자들이 전례에 더욱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예식의 개정을 제시한다.
  • * 사목헌장(기쁨과 희망 Gaudium et Spes: 현대 세계의 여러 문제에 대한 교회의 입장을 밝히고, 인간 존엄성을 강조하며 인류 공동의 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을 촉구한다.
  • '''교령''': 9개의 교령은 주교의 사목직, 교회일치운동, 동방 가톨릭교회, 사제의 직무와 생활 및 양성, 수도생활 쇄신, 교회의 선교 활동, 평신도 사도직, 대중 매체 등 특정 주제나 집단에 관한 내용을 다룬다.
  • '''선언''': 3개의 선언은 비그리스도교와의 관계, 종교 자유, 기독교 교육 등 특정 원칙이나 입장을 천명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이러한 문서들을 통해 교회의 자기 이해를 심화하고 현대 세계와의 적극적인 대화를 모색했으며, 그 가르침은 오늘날까지 전 세계 가톨릭교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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